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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2일 화요일

[연극] 라이어 - “진실 혹은 거짓”

 

[연극] 라이어 - “진실 혹은 거짓”



“진실 혹은 거짓”



누구든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디언 언어로 “내면의 갈등”은 “내안의 두 마리의 개를 키우는 것”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결국 “나”라는 자아는 내가 먹이를 많이 준 살찐 개가 겉으로 나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연극 “라이어”는 그러한 “내면의 갈등”을 도덕적 규범의 무거움을 소재로

아주 가벼우면서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연출자와 배우들의 능력이 관객과의 소통에 호흡을 잘 맞춘 결과가

3000회를 넘는 장기공연의 숨은 비결일 것이다.


또 어쩌면 그러한 거짓을 진실처럼, 아니면 진실을 거짓처럼 날려버리고 싶은

많은 공감대가 녹아있는 까닭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모든 진실은 세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롱을 당하다가 그 다음에는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늘 외롭고 지루한 인내의 시간을 요하는 버거움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실과는 반대로 거짓은 순간으로 다가오는 찰나적 안락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구속이 되었다가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파탄의 지경에 내몰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라이어”는 그러한 거짓의 편안함이 결국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다가

그러한 거짓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서야 비로소 진실처럼 현실이 되어있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수 없이 그러한 거짓을 받아들이게 되는 메시지를 무거움 속에서 아주 가볍게 전하고 있다.


“진실 혹은 거짓”,


언제나 그 두가지의 갈등 속에서

여전히 나는 존재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두 마리의 개가 내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연극] 유리가면 - 안면(顔面)인가, 가면(假面)인가

 

[연극] 유리가면 - 안면(顔面)인가, 가면(假面)인가



안면(顔面)인가,가면(假面)인가




하나의 가면조차 버거운데,

천의 가면을 감당하기는 얼마나 벅찬 일일까.


그러나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각자의 모습과 몫들로 남는가보다.


특히 연기자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서도 자신의 인생을 잘도 다듬어 간다.


물론 때로는 가면(假面)인지 안면(顔面)인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돈 속에서 방황할 때도 있겠지만,


깨어지기 쉬운 유리가면들을 그들은 잘도 소화해낸다.


그냥 얻어진 삶이 아니라 깨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정성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면의 얼굴과 가면의 행동까지도


무엇보다 소중한 삶, 그 자체이었기 때문이리라.


하나의 안면과 가면조차 제대로 관리하기 힘든 삶,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의 보잘 것 없음,


이중의 혼돈조차 헷갈리는 본질의 상실감.


가면을 벗어던지고자  노력은 하지만,

가면은 언제나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현실의 가면은 유리가면이 아닌

그보다는 질긴 그 무엇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연극] 에쿠우스 - 너, 살아서 재갈을 풀어라.

[연극] 에쿠우스 - 너, 살아서 재갈을 풀어라.



자신의 벽속에 갇힌 주인공 알런, 그리고 그를 치유하기 위한 의사 마틴, 또 주위의 사람들.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자를 보고 의사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의사를 보고 환자가 그 정상의 덧없음을 고발한다.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간의 공간은 없다.


각자 스스로의 재갈들만 있다.

누가 강요로 물린 것도 아니고, 모두 스스로 벗어던져야 할 각자의 몫들이다.


누군들 열정에 충실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유를 갈망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삶은 여러 가지 잣대로 의식들을 제약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 익숙해진다. 색깔있는 옷을 입되 좀 더 화려하고 싶고, 자신의 감정이 남들 앞에 드러내어지는 것에 쉽게 떳떳하기 어렵다.


알런의 연인, 질처럼..그렇게 가볍게는 움직이질 못한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일반적으로는 정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을 모두 숭배하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했듯이

어느 것 하나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것들은 우리 주위엔 드물다.


의사는 열정을 파괴할 수 있을 지언정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마틴의 절규같은 고백처럼 쉽게 헤어 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오죽하면 자신의 신(神)이나 종교와도 같은 말의 눈을 찔러 그 앞을 못보게 했을까.

그러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의 제도와 관념으로 판단한다면 알런은 정신병자와 다를 바 없겠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그로부터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에게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얼마일까.

영혼이 자유로운 것만으로 얼마만큼의 위안이 될까.


어머니가 광신도였던 것처럼, 의사 마틴이 자신으로부터의 노예였던 것처럼, 아버지가 그 아내로부터의 종속이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한계들은 있다.


알런이 자신의 종교였던 말의 눈을 찔러 해방을 꿈꾼 것처럼,

각자는 살아서 재갈을 풀어야 한다.

 

어찌보면 그 재갈은 나와 무관한 것들인 듯하나,

따지고보면 스스로 채운 것들이요, 그 것을 풀 수 있는 사람도 정작 자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살아있는 동안 각자의 재갈을 풀자.

그리고 초원으로, 해변으로, 자유를 향해 달리자.


에쿠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