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자유의 내용과 그 한계
인류의 역사는 자유 확대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투쟁의 궁극적 바탕은 바로 각 개인이 처한 상황과 위치, 그리고 이해관계와 가치관에 따른 자유에로의 추구이었다. 그렇게 보면 과연 자유라는 것은 얼마만큼의 크기와 폭, 그리고 깊이로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탐구하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화두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언어적 의미로는 자유란 ‘간섭받지 않는 개인의 자율적 의사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일련의 인간 활동의 폭’이라고 어슬프게나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시대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또한 변화하고 있다. 과연 자유의 영토는 어디까지가 그 경계이며,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과는 또한 무엇인 것인가.
원시시대의 자유는 생존의 보장영역만큼의 크기였고, 중세의 절대적인 권력의 시대에서는 권력으로부터의 은혜로운(?) 배려의 크기였으며,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자본과 기술로부터의 특혜와 소외의 크기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다양한 이해관계들 속에서의 상호 소통의 크기라고 개략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의 영역은 자유의 본질적 내용으로서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권력으로부터의 은혜는 지금은 권력을 창출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제도화로 권력에로의 요구로 변화되고 있고, 자본과 기술의 특혜와 소외는 거래의 투명화와 사회적 책임의 강조로 보완되고 있으므로 결국은 모든 자유의 요소들이 지금까지 끊임없는 성찰로 다듬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가 또한 도구의 역사로 불릴만큼 자유를 설명하고 실행하는 수단들도 개량을 거듭해 왔다. 돌멩이로부터 시작된 창과 방패에서 제도적 구속으로, 제도적 구속에서 의식의 해방으로, 의식의 해방에서 연대의 강조로, 연대의 강조에서 창조적 파괴의 자기성찰로 계속적인 순환을 하면서 자유의 영역에 대한 자기확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제도적으로 자유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헌법이며, 구체적으로 체계화하고 설명하는 곳은 헌법재판소다. 20년 남짓한 헌법재판소의 역사는 자유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쉬움이 있긴 해도 우리 역사의 커다란 성과임에는 분명하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헌법에서의 자유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과 같은 전통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적 자유권의 영역까지 자유의 구체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과 관련된 본질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제한할 수 있으며, 그 제한의 도구개념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례의 원칙’이다. 이른바 ‘과잉금지의 원칙’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정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을 세부적인 저울로 사용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방법이 적당하고 수단이 적절하며, 다른 대책으로는 합리적 대안이 없을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서 가장 적은 양만큼 제한해야 하고, 제한되는 개인의 이익이 공익상 요구되는 이익과 충돌할 때에는 공익이 우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측정할 수 있는 대부분의 수단은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재단하고 적용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전통적 자유중의 하나인 언론의 자유에 있어서도 제한의 합헌성과 합법성이 요구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른바 언론관계법의 개정을 두고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고, 인터넷실명제(제한적 본인확인제)의 규제를 피해 구글은 한국유튜브동영상사이트를 제한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규제를 철폐하여 대자본의 진입을 보다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규제를 설정하여 자유로운 소통을 통제하는 성격의 제도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자본의 언론 독점이 여론의 왜곡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고, 후자의 경우는 개인의 알권리와 알릴권리의 제한이라는 문제가 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선이 합리적인 자유의 영역이겠는가.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경우에는 공정한 경쟁을 위하여 과도한 자본의 개입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후자의 경우는 공익을 고려한다하더라도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선 실효성이 없는 규제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유로운 소통을 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과도 같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본질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바탕으로 제도가 존재해야지 소통을 차단하는 제도는 이미 위헌적인 것이다. 또한 경쟁은 대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체급과 중량이 다른 선수의 싸움을 붙이는 것은 합리적 차별을 넘어서 불평등한 것이며 권위있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늘날의 국가는 권위있는 중재자로서 자리매김을 해야할 것이며, 중재자로서의 권위는 치우침이 없는 공정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것일때 존중되는 것이다. 절차를 존중하고 정신적 소통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민주적인 질서의 기본인 것이고, 자유의 첫단계라고 생각한다.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은 바꿀 수 없지만, 제도는 다수의 공감대에 따라 언제든 수정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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