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이른바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간지대
오늘날 지구상에서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 분단된 역사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미사일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금,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시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의 대가를 치르면서 독재의 과거를 스스로 털어내며 민주화의 꽃을 피운 나름대로의 가시적 성과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비록 아직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들이 수사의 대상이 되거나 정치자금을 둘러싼 온갖 잡음들이 끊이질 않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법의 이름으로 적어도 권력의 무상함을 확인시켜 주어 견제와 균형을 향한 나름대로의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았다. 물론 균형의 공정성은 지속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대변되고 있는 현실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그러했으며, 살아갈 날들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정치 문외한으로 섣부른 정의는 할 수 없지만 한 개인의 삶의 모습 속에서도 보수와 진보적인 생활의 한 단면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가정에서 개인의 삶을 비추어 보면 보통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을 키우면서 남편 혹은 아내가 있는 평균적 가장으로서 지위를 생각할 수 있다. 거기서 개인은 일반적으로 자식들보다는 보수적일 것이고, 부모님보다는 진보적일 것이며, 배우자와는 막상막하의 갈등관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을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물론 보수와 진보는 정치적 개념을 염두에 둔 정의일 것이므로 보다 고차원적인(?) 정치적인 생활관계 속에서의 가치판단이 본질적인 개념정의에 가까울 것이겠지만, 돌아보면 오늘날 개인의 삶 자체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사실은 모두가 일면에서는 보수적이요, 또 한 측면에서는 진보적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의 추구도 사실은 위험사회라고까지 표현되는 급변하고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의 자기 성찰에 무게중심을 두고 가능한 한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어느 쪽에 더 힘을 실어 주어 위기상황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 고민의 산물이며, 소통의 희구라고 생각한다.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는 확실히 덜 위험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에 합리적 보수도 없고, 책임있는 진보도 없다는 극단론적인 대결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보수와 진보사이의 텅빈 공백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고 본다. 주로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들이 보수의 부류에,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이 진보의 측면에 서 있었고, 그 사이에 늘 이도 저도 아닌 중간지대는 있었다.
다만, 그들이 자주 세력화되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을 바꾼 역사는 얼마되지 않지만, 흐름을 바꾼 사건들은 흐름을 바꿀만한 힘이 스스로 결집이 되고 성숙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작위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조건들이 무르익음으로써 자연발생적인 화산의 폭발처럼 순식간에 분출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평소의 중간지대가 결정적인 시기에 한쪽으로 힘을 실어준 결과이기도 한 것이었다.
현실과 이상, 경쟁과 연대, 이익과 가치,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 등등의 이 모든 개념들이 개인의 가치관과 관련하여 어떻게 명백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나누어 분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창조적 파괴의 자기성찰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자유라는 말도 있듯이 나를 제외하고 나를 둘러 싼 모든 요소들과의 소통의 폭을 넓혀 과연 무엇이 지금의 시대에 요구되는 본질적인 가치일 것인가에 매달리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권만큼 무엇이 과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들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과 해답찾기가 바로 무엇이 보수적이고, 어떻게 해야 진보적인 것인가를 가늠하게 해 줄 것이다. 누가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가가가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보다 자신이외의 이익의 우선, 다수의 복리와 소수자에의 배려의 존중, 불균형 속에서 최대한으로 가능한 균형의 추구 등의 가치들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울산 북구에서는 누가 보수이고 진보이며, 전주 덕진에서는 또 누가 보수이고 진보인가의 구별보다는, 또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는가”에 대한 한탄보다는 “이런 국민이 왜 있는가”에 대한 성찰들이 우선되어야 할 가치들인 것이다. 내 집에서는 또 누가 얼마만큼의 진보이고 보수이며, 그들 속에서 나는 그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무엇일 것인가에 대한 답들이 중간지대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경기도 교육감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인사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균형의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현상이고, 비록 낮은 투표율이긴 하나 참여의 힘을 보여준 결과로서 지금의 중간지대의 민심을 표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보수진영은 다시 성찰의 계기로 삼고, 진보진영은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양극단으로 치닫는 파멸을 지양하고 현실적 대안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아니던가.
중간지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다. 늘 고여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힘을 분출하는 바탕이다.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넘치지 않게 쉼없이 엄격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길 아닌 곳으로는 흐르지 않는 정도(正道)이므로 홍수가 있기 전에는 그 길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집을 잃은 서민들과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늘어나고, 직업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청춘들이 넘치게 되면 가운데로 조용히 흐르던 강물도 제대로 범람하지 않고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사후대책보다는 사전예방이 가장 좋은 약이었던 것을 우리의 역사는 또 늘 확인시켜 주었다. 물길을 어느 쪽으로 잡아야 그들이 길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도 우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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