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생각]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생각]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여기 저기서 성폭력범에 대한 분노한 성토들이 일고 있다. 아직 자신의 의사표현에도 미숙한 어린 아동에 대한 성폭행뿐만 아니라, 보호의무자인 아버지의 친딸에 대한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인륜의 구분도 없이 전방위적으로 연속하여 발생하고 있어 사람들의 분노도 극에 달한 듯 싶다.


일명 피해자의 이름(가명으로 알고 있음)인 ‘나영이사건’으로 세간에 불리던 것이 피해자의 인권보호차원에서 가해자의 이름인 일명 ‘조두순사건’으로 통일하여 광고라도 하듯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피해자의 인권을 거론하며 이 사건과 무관한 본명이 진짜 ‘조두순’인 일반 사람(同名異人)들의 인권은 전혀 아랑곳없다.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모순, 더불어 개명신청도 좀 늘어날 것이리라.


이런 사건들의 원인들로는 사회적인 병리현상도 그 한 축을 이루고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분노는 범죄인 개인의 반규범적 행태를 성토하면서도, 나아가 범죄인들의 성범죄행위의 원인이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에도 형을 오히려 감경받은데 따른 법원의 태도에 더 민감한 듯하다.


형법적으로는 범죄행위의 결과가 그러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행해진 경우에는 형을 필요적으로 반드시 감경하도록 하고 있다.(형법 제10조 제2항) 이러한 한정책임능력자인 심신장애의 인정여부에 대해서는 법원이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광범위한 판단의 여지가 있어 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른바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하여 형법이 명시적으로 형의 감경을 배제하고 있음(형법 제10조 제3항)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건 등에서 법원은 양형판단에서 나름대로의 감경의 사유로 고려한 점이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의 괴리를 더욱 크게 한 탓일 것이다.


일명 ‘조두순사건’에서는 검찰의 불항소로 인한 불이익변경금지로 인한 대법원에서의 형의 확정에로의 귀결의 불가피성이, ‘친딸사건’에서는 혈연관계와 부양의무 등이 현실적인 판단의 근거로 고려된 듯 하나, 국민의 감정으로는 보다 강력한 현실적 처벌의 수위를 요구하는 듯 하다.


응보적 엄벌주의가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과도한 엄벌주의와 이른바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방법이 제도화된다면, 만의 하나 혐의가 불완전한 사람도 그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제도가 공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야만은 인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또 하나의 반인륜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화국가에서 비록 ‘반인륜적 범죄’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인륜적 대책’(공소시효배제, 치료감호의 적극적 확대 등)을 모색해야 한다. ‘강제적 거세’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동의를 전제로 한 ‘자발적 거세’라도 남용과 오판의 우려가 있으므로 그러한 ‘야만적 신체형’은 제도화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응보적 감정을 쉽게 무마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비록 현재로서는 개선불가능한 듯이 보일지라도 개선의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들을 평생을 걸쳐서라도 치료하고 교정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인륜적인 대책이 아니겠는가. ‘보복과 격리’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와 치료’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것이 보다 ‘사람사는 세상’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사랑과 용서의 힘이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강력한 형벌로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일, 그것이 ‘사람사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람으로서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라 가끔씩 종교적 절대자의 힘을 갈구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만 다 찾을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리라. 그래도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