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6일 토요일

[생각] 야간옥외집회, 헌법불합치의 의미

 

[생각] 야간옥외집회, 헌법불합치의 의미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와 이에 위반한 경우 처벌할 것을 규정한 동법 제23조 제1호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9인의 재판관 중 5인은 단순위헌의 의견을, 2인은 헌법불합치의 의견을, 그리고 나머지 2인은 합헌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6인의 위헌결정을 선고하기 위한 정족수에는 미달하여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하게 된 것이다.


5인의 위헌의견에 따르면 이 결정은 이미 1994.04.28,91헌바14결정에서 합헌으로 선고한 ‘신고제’와는 달리 헌법 제21조 제2항의 ‘허가’는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집회 이전에 집회의 내용․시간․장소 등을 사전심사하여 특정한 경우에만 허용함으로써 집회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즉 허가받지 아니한 집회를 금지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집회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사실상의 사전허가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집시법 제10조는 야간옥외집회에 관한 일반적 금지를 규정한 본문과 관할 경찰서장의 사전적 심사에 의한 예외적 허용을 규정한 단서를 포함하여 그 전체로서 야간옥외집회에 대한 ‘허가’를 규정한 것이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정면으로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인의 헌법불합치의견의 요지도 이 법 규정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야간옥외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인 범위내로의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사처벌규정에 대한 계속적용의 불합치결정으로 인하여 처벌의 형평성으로 초래될 법적 혼란이 우려되는 점이다.


적용중지의 헌법불합치결정이 아니라 계속적용의 헌법불합치결정은 사실상의 위헌결정이지만 입법형성권의 존중, 법적 안정성 등을 고려하여 새로운 법이 마련될 때까지는 당해 법률이 잠정적으로 효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형사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헌법불합치 선언된 법률이 형벌에 관한 법률이면, 종전의 법률 중 위헌으로 구분된 부분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2항 단서), 그 위헌부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3항)고 규정하고는 있으나,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는 위헌법률에 기한 형사처벌을 허용하는 것이고 위헌법률심판제도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어서 우리 헌법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적용중지의견은 헌법재판소가 어느 법률조항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그 법률조항을 계속 적용하도록 결정하려면 그 점에 대한 특별한 평의와 합의절차를 거쳐야 한다고도 밝히고 있으나, 이미 5인의 위헌결정의 속에는 적용중지의견이 포함된 것이므로 별도의 합의 없이도 적용중지를 선언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변형결정의 형식으로서 헌법불합치의견을 표시한 재판관 2인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의 계속적용을 결정할 수는 없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헌법불합치결정이 사실상의 위헌결정이라는 점, 그리고 형사적 처벌은 재산적 권리침해의 경우와는 달리 국민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초래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성질상 법적용은 중단되어야 하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양형판단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무죄선고 또는 재판의 연기를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헌법불합치결정으로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을 적용하여 경찰이 집회의 현장에서 법을 적용하여 이를 집행하거나, 그것을 근거로 형사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법감정에도 반하는 일이다.


5인의 위헌의견 속에 내포된 적용중지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 헌법정신과 국민의 법감정에 더욱 부합하는 일일 것이며, 9인 중 5인의 의견이 이미 위헌으로서 적용중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머지 4인의 의견이 이미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의 효력을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결론 일 것이라고 본다.



[헌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 등 위헌제청(2009.09.24,2008헌가25)(헌법불합치)

 

[헌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 등 위헌제청(2009.09.24,2008헌가25)(헌법불합치)



헌법재판소는 2009년 9월 24일 관여 재판관 5(위헌):2(헌법불합치):2(합헌)의 의견으로,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를 금지하고, 일정한 경우 관할경찰관서장이 허용할 수 있도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제10조 중 ‘옥외집회’부분과 이에 위반한 경우 처벌하도록 한 집시법 제23조 제1호 중 ‘제10조 본문의 옥외집회’부분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고, 위 조항들은 2010. 6. 30.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재판관 5인(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이공현, 재판관 조대현, 재판관 김종대, 재판관 송두환)의 위헌의견은, 위 집시법 제10조부분은 헌법 제21조 제2항이 금지하는 집회의 사전허가제에 해당하여 헌법에 위반되고, 그에 따라 위 집시법 제23조 제1호 부분도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위헌의견을 낸 재판관 중 2인(재판관 조대현, 재판관 송두환)은, 위 집시법 제10조 부분중 본문은 합리적 사유도 없이 집회의 자유의 상당 부분을 박탈하는 것으로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된다는 점을 함께 선언해야 한다고 위헌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추가하였다.


재판관 2인(재판관 민형기, 재판관 목영준)의 헌법불합치 의견은, 위 집시법 제10조 부분은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허가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를 넘어 과도하게 야간옥외집회를 제한함으로써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하여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고, 위 조항을 구성요건으로 하는 같은 법률 제23조 제1호 중 ‘제10조 본문의 옥외집회’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 단순위헌 의견(5인)만으로는 헌법재판소법 제23조 제2항 제1호에 규정된 법률의 위헌결정을 함에 필요한 심판정족수(6인)에 이르지 못하지만 헌법불합치 의견(2인)을 합산하면 법률의 위헌결정을 함에 필요한 심판정족수를 충족하였다. 다만, 결정의 주문은 단순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재판관 2인(재판관 김희옥, 재판관 이동흡)의 합헌의견위 집시법 제10조 부분은 집회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중립적인 시간적 기준에 의한 사전적 제한으로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위배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지도 아니하므로 헌법에 위반되지 않고, 따라서 위 집시법 제23조 제1호 부분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단순위헌의견을 낸 재판관 1인(재판관 조대현)헌법불합치결정을 하더라도 위 집시법 제10조와 제23조 제1호 부분의 계속적용을 해서는 안된다는 적용중지의견이 있었다.



1. 사건의 개요


(1) 제청신청인은 2008. 5. 9. 19:35경부터 21:47경까지 야간에 옥외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주최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되었고, 1심 계속중 제청신청인에게 적용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 제23조 제1호가 헌법상 금지되는 집회의 사전허가제를 규정한 것으로서 헌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신청을 하였다.


(2) 당해사건 법원은 위 법률조항들이 당해사건 재판의 전제가 되고, 위헌이라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2008. 10. 13. 이 사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였다.



2. 심판의 대상


이 사건 심판의 대상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2007. 5. 11. 법률 제8424호로 전부 개정된 것, 이하 ‘집시법’이라 한다) 제10조 중 ‘옥외집회’ 부분 및 제23조 제1호 중 ‘제10조 본문의 옥외집회’ 부분(이하에서 ‘집시법 제10조’ 또는 ‘집시법 제23조 제1호’라고 하는 경우 위와 같은 부분에 한정된다. 또한 위 두 조항을 합하여 이르는 경우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라 한다)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2007. 5. 11. 법률 제8424호로 전부 개정된 것)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집회의 성격상 부득이하여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미리 신고한 경우에는 관할경찰관서장은 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도 옥외집회를 허용할 수 있다.

제23조(벌칙) 제10조 본문 또는 제11조를 위반한 자, 제12조에 따른 금지를 위반한 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주최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의 벌금



3. 결정이유의 요지


(1) 위헌의견의 요지


(가) 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이공현, 재판관 조대현, 재판관 김종대, 재판관 송두환의 위헌의견


1) 헌법 제21조 제2항은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 등 금지와 아울러 집회에 대한 허가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상의 집회에 대한 허가금지조항은 1960. 6. 15. 개정 헌법 등에서 규정되었다가 1972. 12. 27. 소위 유신 헌법에서는 삭제되었으나, 현행 헌법에서 다시 규정된 것인 바, 이는 언론․출판의 자유와 아울러 집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집회의 허용여부를 행정권의 일방적, 사전적 판단에 맡기는 집회에 대한 허가제는 집회에 대한 검열제와 같으므로 이를 헌법적으로 금지하겠다는 헌법개정권력자인 국민들의 헌법적 결단으로 보아야 한다.


2) 따라서 헌법 제21조 제2항의 취지는 집회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허가 뿐만 아니라 집회의 시간․장소를 기준으로 한 허가도 금지된다는 의미이므로 옥내․외의 집회나 주․야간의 집회를 막론하고 집회 전반에 걸쳐 허가제는 금지된다는 의미이다.


3) 그리고 헌법 제21조 제2항의 ‘허가’는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집회 이전에 집회의 내용․시간․장소 등을 사전심사하여 특정한 경우에만 허용함으로써 집회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즉 허가받지 아니한 집회를 금지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우리 재판소가 이미 합헌 결정을 한 바 있는 집회에 대한 신고제와는 그 의미와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다.


4) 그런데 집시법 제10조는 야간 옥외집회에 관한 일반적 금지를 규정한 본문관할 경찰서장의 사전적 심사에 의한 예외적 허용을 규정한 단서를 포함하여 그 전체로서 야간옥외집회에 대한 ‘허가’를 규정한 것이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다.


세계각국의 입법례에 의하더라도, 영국,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등은 야간옥외집회를 특별히 금지하거나 행정권에 의한 허가의 방법으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으며, 프랑스에서는 밤 11시 이후의 집회만을, 러시아의 경우에도 밤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의 집회만을 금지하고 있는 점과도 비교된다.


5) 결국, 집시법 제10조 중 ‘옥외집회’ 부분은 헌법 제21조 제2항에 위반되고, 그 처벌조항인 집시법 제23조 제1호 중 ‘제10조 본문의 옥외집회’부분도 헌법에 위반된다는 취지이다.


(나) 재판관 조대현, 재판관 송두환의 위헌보충의견


1)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헌법 제21조 제2항에 위반된다고만 선언할 경우에, 국회가 집시법 제10조 단서를 삭제하면 허가제에는 해당하지 않게 되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위반되는 점은 해소되지만, 집시법 제10조 본문이 야간옥외집회를 일반적․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점의 위헌성은 여전히 남게 되므로 집시법 제10조 본문의 헌법 제37조 제2항 위반을 함께 선언할 필요가 있다


2) 헌법과 집시법은 평화적인 집회만을 보호하는 것이고, 집회과정에서 공공질서나 타인의 법익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형법 기타의 법률에 의하여 처벌대상으로 되기 때문에, 공공질서나 타인의 법익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는 예상만으로 집회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야간옥외집회가 항상 타인의 법익을 침해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타인의 법익을 침해할 개연성이 확실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러한 위험성을 예방하기에 필요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면 되는 것이므로, 야간옥외집회의 법익침해가능성을 내세워 모든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집시법 제10조 본문이 야간옥외집회를 일반적․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합리적 사유도 없이 집회의 자유를 상당부분 박탈하는 것으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된다.


(2) 재판관 민형기, 재판관 목영준의 헌법불합치의견


1) 입법자가 법률로써 일반적으로 집회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 제21조 제2항이 금지하는 집회의 사전허가에 해당하지 않고, 입법자는 법률로써 옥외집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시간적, 장소적 및 방법적인 제한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법률적 제한이 실질적으로는 행정청의 허가없는 옥외집회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헌법상 금지되는 사전허가제에 해당되지만, 그에 이르지 않는 한 헌법 제21조 제2항에 반하는 것은 아니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하여 집회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지 여부만이 문제된다.


집시법 제10조 본문은 입법자가 스스로 옥외집회의 시간적 제한을 규정한 것이고, 단서는 본문에 의한 제한을 완화시키는 규정인바, 법률에 의한 시간적 제한으로써 헌법 제21조 제2항의 ‘사전허가금지’에 위반되지 않는다.


2) 옥외집회는 개인적 의사표현의 경우보다 공공의 안녕질서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야간이라는 특수한 시간적 상황의 경우, 시민들의 평온이 특히 요청되는 시간대임에도, 집회 참가자 입장에서는 감성적으로 민감해져 자제력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은 한편 행정관서 입장에서는 폭력적 돌발상황에 대한 대응이 어려워 질서유지가 어려운 특성이 있다.

집시법 제10조는 이러한 ‘야간’시간대의 옥외집회의 특징과 차별성을 고려하여, 원칙적으로 야간옥외집회를 제한하는 것으로, 그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적합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집시법 제10조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라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시간대의 옥외집회를 금지하는바, 주간동안 직업활동이나 학업활동을 해야하는 직장인이나 학생 등은 사실상 집회를 주최하거나 참가할 수 없도록 하여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박탈하거나 명목상의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도시화․산업화가 진행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앞서 살핀 야간의 특징이나 차별성은 주로 ‘심야’의 특수성으로 인한 위험성이라 할 것이고, 우리 집시법은 제8조, 제12조, 제14조 등에서 국민의 주거 및 사생활의 평온과 사회의 공공질서가 보호될 수 있는 보완장치를 두고 있으므로, 옥외집회가 금지되는 야간시간대를 집시법 제10조 본문과 같이 광범위하게 정하지 않더라도 입법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시법 제10조는 목적달성을 위해 필요한 정도를 넘는 지나친 제한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도한 제한을 완화하기 위하여 위 조항 단서는 관할경찰관서장이 일정한 조건하에 이를 허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그 허용 여부를 행정청의 판단에 맡기고 있는 이상, 과도한 제한을 완화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집시법 제10조는 침해최소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것이고, 이와 같은 광범위한 시간대의 제한으로 인하여 집회예정자가 받을 침해가 이로 인하여 달성할 공익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으므로 법익균형성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결국 집시법 제10조는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하여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되고, 이를 구성요건으로 하는 집시법 제23조 제1호의 해당 부분 역시 헌법에 위반된다.


3)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는 위헌적인 부분과 합헌적인 부분이 공존하고 있으며,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중 어떠한 시간대에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것이 입법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집회의 자유를 필요최소한 범위에서 제한하는 것인지에 관하여는 이를 입법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 대하여 헌법불합치의 결정을 선고하되, 입법자가 2010. 6. 30. 이전에 개선입법을 할 때까지 계속 적용되어 그 효력을 유지하도록 하고, 만일 위 일자까지 개선입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위 법률조항들은 2010. 7. 1.부터 그 효력을 상실하도록 한다.


4) 종전에 헌법재판소가 이 결정과 견해를 달리해 집시법 제10조는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1994. 4. 28. 91헌바14결정이 결정과 저촉되는 범위 내에서 이를 변경하기로 한다.


(3) 재판관 김희옥, 재판관 이동흡의 합헌의견


1) 집회에 대하여 일반적인 허가제를 정하여 이를 사전에 억제하는 것은 헌법 제21조 제2항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으나,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집회의 자유에 관한 사전억제적인 제한을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사전제한은 내용중립적인 집회의 시간, 장소 및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 하에서 가능하고, 이러한 제한은 헌법 제21조 제2항의 금지된 허가에 해당하지 않는다.


야간옥외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집시법 제10조는 야간, 즉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라는 내용중립적이고 구체적이며 명확한 시간적 기준을 정하고 있으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서 금지하고 있는 허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2) 집시법 제10조는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의 조화라는 정당한 입법목적 하에 규정된 것으로서, 야간의 옥외집회는 ‘야간’의 특수성과 ‘옥외집회’라는 속성상 공공의 안녕질서를 침해할 수 있는 높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집시법 제10조는 입법목적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적합한 수단이다.


한편 질서유지가 어려운 야간의 특성과 집회에 참가하지 않는 일반 국민의 휴식권, 통행권 등의 보호필요성 및 우리나라의 계절적 특성이나 주거․상업지역의 밀착성 등으로 인하여 시간적․장소적 규제의 세분화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 집시법 제10조 단서에서 야간옥외집회가 허용되는 예외를 정하고 있는 점, 학문․예술․체육․종교 등의 집회에는 집시법 제10조가 적용되지 않는 점, 주5일제의 확대실시 및 인터넷 보급 등으로 대안적 의사소통수단이 마련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집시법 제10조가 규정한 ‘야간’이라는 시간적 사전규제 범위가 과도하다고 보기 어렵고, 집시법 제10조가 달성하려는 공익에 비하여 이로 인한 집회의 자유의 제한은 감수할 만한 정도로 평가되므로 집시법 제10조가 침해의 최소성이나 법익균형성 원칙에 반한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집시법 제10조는 과잉금지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3)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의 조화라는 입법목적 달성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적 규제가 필요하고 상당한 것인가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의회가 합리적인 입법재량의 범위 내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집회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할 정도로 입법재량의 범위를 현저히 벗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


(4)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


1) 위헌법률심판의 본질적 효력은 위헌법률의 제거이고, 헌법재판소가 법률의 위헌을 선언할 때에는 실효되는 범위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 다만 법률조항 중 일부는 위헌이고 일부는 합헌인 경우, 위헌부분을 특정하여 가려낼 수 없거나, 권력분립의 원칙상 그 구분을 입법형성권에 맡기는 것이 타당한 때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필요하고,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는 경우 국회는 헌법불합치 선언된 법률에서 위헌부분을 제거하는 개선입법을 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


국회의 개선입법에 존속하게 된 내용은 합헌부분으로서 종전 법률의 효력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개선입법이 시행되기 전의 사항에 대하여 계속 적용된다. 개선입법에 따라 위헌으로 구분된 부분은 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2항에 의하여 효력을 상실한다.


헌법불합치 선언된 법률이 형벌에 관한 법률이면, 종전의 법률 중 위헌으로 구분된 부분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2항 단서), 그 위헌부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3항).


2) 위헌부분이 포함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을 헌법불합치 결정 선고 후 개선입법 이전에 계속 적용하게 하는 것은, 헌법재판소가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 위헌부분이 포함되어 있음을 선언하였고, 그 위헌부분이 국회의 개선입법에 의하여 구분되면 소급적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 위헌부분이 포함된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 의하여 처벌받은 뒤, 나중에 위헌부분에 의하여 처벌받았음이 밝혀지면 재심을 청구하여 구제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위헌법률에 기한 형사처벌을 허용하는 것이고 위헌법률심판제도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어서 우리 헌법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3) 헌법재판소가 어느 법률조항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그 법률조항을 계속 적용하도록 결정하려면 그 점에 대한 특별한 평의와 합의절차를 거쳐야 한다. 헌법불합치의견을 표시한 재판관 2인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의 계속 적용을 결정할 수는 없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개선입법이 이루어질 때까지 적용 중지되어야 한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최근의 기사를 보면 북극의 얼음이 녹아 독일 화물선 두 척이 지난 7월 23일 울산에서 발전소 건설자재를 싣고 오호츠크해협을 통과해 러시아 연안 북극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들렀다가, 마침내 북극해를 관통하여 러시아 아르한겔스크항에 도착함으로써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다고 한다.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라고 불리는 이 바닷길을 러시아배가 아닌 국제 상선이 통과하는 것은 처음이고, 북동항로가 열림으로써 기존 항로보다 무려 1만4000㎞로 단축되어 이로부터 유발되는 경제적 효과 때문인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이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필연적 귀결인지 아니면 주기적 현상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인지의 문제다.


지구온난화는 말 그대로 지구 표면의 평균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며, 그 최근의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 발달에 따른 화석연료의 사용과 환경의 파괴로 정화기능이 약화되면서 생긴 온실가스의 영향때문으로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온난화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어왔다고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온난화의 원인은 주로 자연활동으로 인한 장기적 변화였다면, 오늘의 원인은 주로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단기적인 급격한 변화에 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사실(현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들이다. 즉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환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특수한 현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일상적인 자연활동의 한 측면인 주기적인 일반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들을 보게 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인식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행복의 추구라는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대책을 추구하게 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특수한 현상으로서 위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불순한(?) 다른 목적이 개입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자유의 구속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으며, 자연의 보편적 현상으로만 보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위험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다르게 하는 것은 바다로 가는 강물의 뿌리가 여럿이듯이 다른 각도에서 균형을 찾아감으로써 현재로서는 증명하기 어려운 해답을 모색하는 데에는 유용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오류를 피하고,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도 다양한 접근방식의 선택은 여전히 유용한 분석도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도 현실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단기적으로는 위험한 현상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추세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일상생활의 주변에서도 많이 확인 할 수가 있다.


단편적인 예로 주식시장에서의 주가의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살펴보더라도 단기적인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장기적인 추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크게 보면 추세 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변동도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순간만큼은 마치 지구의 종말처럼 절박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또 어느 정도의 추세를 나타낼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위험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거대기술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 이 위험 사회를 너머 '새로운 근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근대화는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의존해왔지만, 앞으로의 선택은 '속도'보다는 '안전'을, '외형'보다는 '내실'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한 순간도 ‘위험’이 아닌 적은 없었다. 비록 예견된 위험이었지만 감수하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선택들이 일상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는 쉽게 안정적인 역사가 되지만, 눈앞의 순간들은 늘 불안정적인 위험으로 강조되면서 본성적인 불안심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종교가 불안정적인 일상적 현실과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풀려지거나 고통을 배가한 역기능적 안순환의 경험(종교전쟁 등)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향들의 주류는 바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때문이리라. 종교보다는 과학적 성찰들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을 모두 잠재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뉴욕에서는 2012년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합의한 ‘교토의정서’가 만료됨에 따라 오는 12월 새로운 협약을 마련하고자 코펜하겐에서 열릴 기후변화총회에 대비하여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은 새로운 협약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온실가스 감축량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은 크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분명히 진행중인 지구온난화의 사실에 대한 ‘회의론’과 ‘옹호론’, ‘추세론’과 ‘위험론’을 떠나서,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현실인 ‘오늘의 위험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존을 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현재의 위험’ 속에 있다. 그 선택은 ‘자유’보다는 ‘공정’을, ‘선동’보다는 ‘성찰’을, ‘탐욕’보다는 ‘공감’을, ‘독선’보다는 ‘협력’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생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구시대의 모순에 항거하여 목숨을 건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쟁취한 이래로 시민의 권리로 인정되어 권리장전으로서 오늘날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논란은 있지만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추가적인 공식이념으로서 채택된 박애의 정신이란 또한 과연 무엇일까.


자유란 원하지 않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개별적 자유의지의 실현 등의 의미로, 평등이란 합리적 이유없는 차별적 대우의 배제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할 것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의 권리의 침해금지, 도덕규범의 준수 등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 스스로의 내재적 한계를 갖는 개념이다.


평등이란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 본성의 질서가 예견하지 못한 또 다른 힘에 의하여 어느 한 쪽으로의 쏠림을 방지하여 균형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다수 인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도구적 권리이다. 물론 평등권도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으로서 자연적인 기본적 인권이지만, 자유의 침해를 한계짓는 방어막으로서의 역할도 함께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찌보면 자유가 갖는 내재적인 한계는 평등의 실현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존재하게 된다. 즉 개인의 무한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권리나 도덕규범 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면, 이때 타인의 권리와 규범의 내용을 고려하는 기준으로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평등의 이념일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아직도 유효한 인간의식의 활동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내용도 ‘자유’를 우선할 것인가, ‘평등’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은 모두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도 자유를 강조하면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평등’을 강조하면 ‘사회민주주의’체제를 말하게 되는 것이리라.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헌법의 정신은 바로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평등’을 고려한 제도적 장치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의 규제와 조정을 허용하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일 것이며, 그 외에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의 이름으로 보장되는 ‘사회적 자유권’들이다.


이런 이해들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의 정치질서를 ‘사회적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일의 선후, 방법의 선택 등을 두고는 여전히 많은 견해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결국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인 동시에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작금의 현실을 토대로 지금 20대8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50대5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80대2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의 가치와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보수적 세력’들은 지금 현재의 20대80의 구도를 유지하려 하고, ‘진보적 세력’들은 지금의 구도를 깨고 뭔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므로 모든 활동은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생존의 추구’이므로 바로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이다. 양육의 결과로서 ‘다듬어진 욕망’이 또 다른 인간 본성인가의 문제는 두고 보더라도 ‘생존의 본성’은 ‘양육의 본성’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조차도 늘 감시하지 않으면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의 가치는 유기적 생물체의 진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분화하므로 진보의 분열은 본질적인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세력들이 분열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진보더러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진보의 연대는 일시적으로 사안별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영속적인 연대는 본질적인 속성과 배치되므로 힘든 일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프랑스혁명의 사상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애사상이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되지 않았고, 혁명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박애’를 강조한 기록은 1793년 파리시 집정관회의이며,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등장하였다고 하지만, 박애로써 자유와 평등은 비로소 규정된다.


자유의 가치도, 평등의 가치도 박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본성인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과 비록 양육의 결과이긴 하지만 ‘다듬어진 욕망’의 갈등구조가 탐욕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선순환을 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끊임없이 ‘박애’를 양육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새로운 총리 하토야마의 ‘우애’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늘 가슴에 품고는 있지만 익숙하게 내뱉지 못하는 말 ‘사랑’이 또한 그것이리라.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생각] 국민과 국가

 

[생각] 국민과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 국가가 발생한 이후로 국가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국가의 지위는 크게 침탈자로서의 국가, 조정자로서의 국가, 보호자로서의 국가, 동행으로서의 국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경찰국가, 야경국가, 복지국가, 문화국가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도 각 의미를 달리 한다.


즉 경찰국가의 시대에는 침탈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야경국가에서는 조정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복지국가에서는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도화된 권력인 국가의 본질적 속성인 침탈자, 조정자, 보호자의 성질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국가의 성질을 문화국가로 보는 개인적 입장에서 국가는 공동체 형성의 동등한 요소로서 국민과 좋은 동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의미의 문화국가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의미의 복지국가 또는 사회법치국가와 동일한 의미라고들 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정하여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폭넓게 허용하면서 공감대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동등한 동반자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능동적 동행으로서의 ‘공정국가’를 의미한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제임스 섬너 메인 경(Sir Henry James Sumner Maine, 1822∼1888)이 언급한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법진화의 법칙’도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계약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계약의 자유’에서 ‘계약의 공정’으로의 가치의 ‘거대한 변환’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즉 자유만이 능사가 아니며 공정한 가치에로의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변환’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요인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 또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치인 노동능력, 제도와 신뢰의 표시인 화폐, 만인이 공유해야 할 자연 등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마저도 상품으로서 포장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그 가치의 본질적 성질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 불안정적 요인들을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라면 불안정 요인들의 안정적이고 선순환적인 작용을 위한 기제들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국가이므로 ‘자유를 향한 절차에서의 국가의 공정’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은 비록 시장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본래적 의미의 시장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욕망의 한계를 넘어 경쟁의 이름으로 탐욕의 질주를 하고 있는 ‘난장(亂場)’만이 보일 뿐이다. 더욱이 오늘날 위험사회의 문화국가에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국가기능과 역할의 강조가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같이 국민을 향한 국가의 적대적 행태는 역사를 거꾸로 돌려 과연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금 갖게 한다. 정부가 법원을 동원하여 국민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며, 그것이 이른바 ‘명예’라면 누구의 무엇을 위한 명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차라리 노무현처럼 다시 정부의 신임을 묻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현행 헌법상으로는 신임투표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미 선례로서 헌법적 관습이 되어 있으며, 규범도 유기적 진화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개인적 입장으로는 현행 헌법해석으로도 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성찰없이 일방적으로만 관행화된 권력행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들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며 결국에는 많은 다수를 불행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상처로 남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서 7장 12절 말씀은 하나의 하느님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국가의 원수이든, 국민이든 동일한 행동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성찰하는 ‘공정국가’라면 국민을 상대로 침탈자로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조정자, 보호자로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