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생각] 소통의 의미

 

[생각] 소통의 의미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소통’이라는 단어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소통’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소통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전적으로는 ‘어떠한 것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소통의 주체가 사물일 경우에는 배관의 막힘이 없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말할 것이고, 생명체의 경우는 생존을 위한 신호의 전달을, 사람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의미의 전달을 포함하는 것이리라.


또한 소통의 목적은 파멸과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예방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배관이 막히면 누수가 생겨 결국에는 시설의 파열을 가져 올 것이고, 상호간의 소통이 부재인 사회에서는 갈등이 쌓여 분열과 투쟁의 씨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최근의 우리 사회의 일련의 문제들을 보면 일방에서는 ‘소통’을 이야기 하고, 다른 일방에서는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한다. 서로가 ‘소통’이 중요하다고 인식은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그러한 ‘소통’이 ‘소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기질과 특성, 환경에 따라 소통의 방법도 다양할 것이다. 최근의 인터넷 환경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트위터와 같은 포괄적 다수(불특정 다수와 특정 다수의 중간적 의미)를 상대로 한 실시간 소통의 방식도 있을 수 있고, 블로깅과 댓글을 통한 소통의 방식도 모두 의미있는 방식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고, 토론과 연구를 하기도 하고, 글과 그림으로 또는 음악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한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 표현의 자유로서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적 인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소통’과 ‘배설’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부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행태가 의지를 가진 다수 사람들의 소통을 왜곡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소통’과 ‘배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바탕으로 하는 쌍방향성을 갖는 것이라면, 후자는 일방적인 개인적 욕망의 방출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다수에게 본래의 의미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가 설정하고 있는 소통의 기준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합리성과 충분한 포괄성을 가진 것인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합리성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는 이성적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배설’도 그 자체를 막는 것은 곤란하다.


극단적으로 역설적이긴 하지만 ‘배설’이 자양분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일상은 늘 ‘배설’과 함께한다. 따라서 길은 늘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주관적인 ‘개인의 선의’ 와 검증되지 않은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애당초 접근 자체를 제도하기 시작한다면 또 누군가는 그와 같은 이름으로 통제를 합리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미의 소통이 ‘진정한 의미의 배려심 있는 전달’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그런 선의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배설’들은 감수하여야 할 부분은 있을 것이고, 감수의 방법은 ‘일단은 들어보고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가치와 의견도 받아들이려는 ‘배려’가 소통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얼토당토 않은 말들은 처음부터 아예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더 큰 오류의 시작이고 비극의 씨앗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의견이 소통의 전제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 걸음일 것이다.


무엇이 서로 다른 부분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길 위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들을 늘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생각들은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다양성을 훼손하는 자본의 미디어독과점은 제도적으로 규제되어야 한다. ‘사상의 시장’에서는 ‘의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에 우선하는 것이 헌법정신일 것이다.


과거의 획일주의가 성장일변도의 시대에서는 경쟁력이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 세계는 다양성이 경쟁력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양 각색의 의견들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정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길도 여러 갈래여야 하고, 폭도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 ‘자본의 자유’보다는 ‘사상의 자유’가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소통의 강은 늘 경계를 흐른다. 이 편과 저 편은 그 사이의 강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강은 양 쪽을 모두 끌어안고 바다로 간다. 한 때는 좌로, 또 한 때는 우로 기울어져 흐르기도 하지만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소통의 폭이 넓을수록 바다는 그만큼 가깝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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