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생각] 좌우의 좌표

 

[생각] 좌우의 좌표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늘 회자되는 좌우라는 개념의 역사적 출발은 많은 사람들이 구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입헌군주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오른 쪽 점유자들과,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며 공화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왼쪽 점유자들의 자리 위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나폴레옹의 제정과 일시적 왕정복고를 거쳐 1848년 2월혁명으로 완전히 구제도가 타도됨으로써 오늘날의 자유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구제도에 대한 대항세력이었던 시민계급이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과 유산자계급(부르조아)으로 분리되어 전자는 사회주의 좌파의 세력으로, 후자는 자유주의 우파의 세력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흔히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시대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현대 정치사의 새로운 화두인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분열과 연대는 줄곧 있어 왔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도 일각에서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를 최초의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를 그 연장선에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모두 결과적으로 우파정권이지 좌파정권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으며, 각양각색이다.


개인적인 짧은 생각으로는 좌우의 대립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프랑스혁명의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며, 오히려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노무현의 고민 중 큰 하나이기도 했던)인 역사와 함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을 따져 자세히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음양의 조화를 통하여 중용의 도를 추구하는 동양의 사상들에게서 더 수월하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본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것도 개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신채호가 본래 의도한 의미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를 정의한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보며, 그러한 개인과 사회(비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사회),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넓은 의미의 사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대립으로 요약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절충적인 산물인 ‘좌파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사회주의’ 등의 용어가 모순이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며,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현재의 위험사회에서 그러한 고민들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동등한 역사의 원동력이듯이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가치들은 서로가 다른 지향점을 갖더라도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는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좌파적(진보적) 입장에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강조하여 사회개혁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고, 우파적(보수적) 입장에서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입장에서 현실유지적 최소한의 변화만을 지향하는 것으로 대강의 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면 진보적 가치는 흐름(변화)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경향을 가지고, 보수적 가치는 그들만의 댐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주로 대부분의 좌파적(진보적) 사람들은 강의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고, 우파적(보수적) 사람들은 주로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다. 상류는 상류대로, 하류는 하류대로 그 강을 경계로 또 양분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바다(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를 향하고는 있다. 하류가 바다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한 것은 아니며, 상류도 또한 하늘(바다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보다 가까이 있지만 그들만의 승천(가치실현)으로는 대지를 적시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늘 분열하되 어느 지점에서 합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상류의 사람들은 하류보다 많은 갈래로 나뉘어 분열과 투쟁이 그 속성처럼 되어 있으며, 연속되기 힘든 가는 줄기로 인하여 금새 말라버릴 우려가 있는 취약성으로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적 정책과 안전망이 요구되며, 하류의 사람들은 대세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여 기득권을 보호하길 선호하므로 대체적으로 간섭받길 싫어한다. 그러므로 양쪽의 균형을 유지하여 강을 연속하여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이끌어 가는 제도세력의 철학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제도세력의 기반이 좌파적이었든, 우파적이었든 간에 일단 제도적 권력이 되면 스스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좌파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권력은 본질적인 균형지향성 또는 그 밖의 이유로 ‘공동체의 안정’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그러한 ‘안정성추구’가 바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비제도화된 세력으로부터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가 요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진보세력 중에서도 제도화된 진보의 가치와 제도화되지 않은 ‘날진보’의 색깔은 또 다르다.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는 지속적인 감시체계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는 이 즈음에는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투표권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여건들을 최대로 확대시키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민주주의도 차선인 마당에 대의제가 최선일 수는 없다. 간접민주주의(선거기회의 확대를 주로 한 참여의 확장)를 기본으로 하되,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들(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좌우의 좌표는 결코 좌우 비례의 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곡선으로 일시적 치우침이 있더라도 지향점은 늘 양자의 균형을 향해 가는 것이어야 한다. 내 눈으로 볼 때는 모두가 회색인인 지금 ‘회색인들의 사회’라고 맹목적인 자책과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회색의 스펙트럼 중에서도 가치를 선택하고 행동의 순서를 정하는 본질에 더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강은 경계를 따라 흐르지만, 그것은 분열의 진행의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며, 그 회색의 물빛이 겉으로 힐끗 보기에는 전부 같은 빛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스스로의 색깔을 잃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각자의 빛깔로 함께 어울리며 흐르고 있다는 성찰과 자각이 회복불가능한 강의 오염과 고갈을 방지하는 본질일 것이며, 다수의 그런 생각들이 모일 때 물빛은 또한 겉으로도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리라. ‘먹고 사는’ 문제 중에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에 따라 흐르는 강물의 좌표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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