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3일 일요일

[생각] 사상의 자유의 진화

 

[생각] 사상의 자유의 진화



최근의 개헌 논의에 있어 기본권적 측면에서도 사상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와 구별하여 별도로 규정하려는 입장들이 있다. 학자들의 입장도 양자를 구별하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과 양심의 자유로 충분하다는 입장, 그리고 양심의 자유와 구별되지만 현행 헌법상의 다른 규정을 근거로 사상의 자유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행 헌법의 규정으로도 충분히 사상의 자유를 규정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근거로 일차적으로는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를 들 수 있고, 부차적으로는 헌법 제10조와 제37조 제1항 등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의 개념을 ‘개인의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형성과 그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헌법재판소의 ‘양심’에 대한 넓은 정의인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에 포섭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총괄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 주의, 主義)’를 포함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의 ‘이데올로기원론’(1804년-1815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 ‘독일이데올로기’(1845년)에서는 관념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양식 등의 사회의 하부구조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상부구조로서의 관념을 의미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까지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 후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중도, 복지정당이 세계의 대세를 점하여 이전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움 없이 직업적, 전문적인 정치가・관료에 의하여 순수한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현대의 대세라며, 성급하게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며, 여전히 의식으로써의 조종이 가능한 존재이므로 쉽사리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전의 계급투쟁을 향한 기계론적 관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가치들의 상대적인 관점의 기능론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의식활동’임에 분명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각자의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다양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개별적 가치들의 갈등과 욕망의 구조로 뚜렷이 남아있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가치들도 크게 다시 세가지의 부류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교활한 집단’과 ‘성찰하는 집단’ 그리고 ‘무지한 집단’이 그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보수적 집단은 ‘교활한 보수’, ‘합리적인 보수’, ‘무지한 보수(날보수)’로, 진보적 집단은 ‘교활한 진보’, ‘책임있는 진보’, ‘무지한 진보(날진보)’ 등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본다.


이른바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끊임없이 조화로운 공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가치의 본질에 충실한 바람직한 집단의 사람들이며,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는 비록 깨어있지만 변절을 일삼아 신뢰할 수 없는 이기적인 집단들이고,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소질과 환경의 영향으로 맹목적인 가치에 종속된 성향을 보이는 계몽이 필요한 대상들이다.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의 대화가 수월한 이유는 그들 집단의 공통점인 ‘제도화된 세력’이라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들도 같이 제도화된 세력들이지만 진정성이 부족하며,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개인과 제도로부터 소외된 세력’으로서 쉽사리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에 이용당하기 쉬운 경향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도 예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력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연대의 연속선상에 있다. 다만 싸움의 형식적인 모습만 차이가 있을 뿐, ‘먹고 살기위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사상은 여전히 유효한 생존의 가치들이며, 연대를 향한 갈증은 변함없는 인간 삶의 현주소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개헌논의와 상관없이 사상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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