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생각] 국민과 국가

 

[생각] 국민과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 국가가 발생한 이후로 국가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국가의 지위는 크게 침탈자로서의 국가, 조정자로서의 국가, 보호자로서의 국가, 동행으로서의 국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경찰국가, 야경국가, 복지국가, 문화국가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도 각 의미를 달리 한다.


즉 경찰국가의 시대에는 침탈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야경국가에서는 조정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복지국가에서는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도화된 권력인 국가의 본질적 속성인 침탈자, 조정자, 보호자의 성질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국가의 성질을 문화국가로 보는 개인적 입장에서 국가는 공동체 형성의 동등한 요소로서 국민과 좋은 동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의미의 문화국가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의미의 복지국가 또는 사회법치국가와 동일한 의미라고들 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정하여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폭넓게 허용하면서 공감대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동등한 동반자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능동적 동행으로서의 ‘공정국가’를 의미한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제임스 섬너 메인 경(Sir Henry James Sumner Maine, 1822∼1888)이 언급한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법진화의 법칙’도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계약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계약의 자유’에서 ‘계약의 공정’으로의 가치의 ‘거대한 변환’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즉 자유만이 능사가 아니며 공정한 가치에로의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변환’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요인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 또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치인 노동능력, 제도와 신뢰의 표시인 화폐, 만인이 공유해야 할 자연 등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마저도 상품으로서 포장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그 가치의 본질적 성질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 불안정적 요인들을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라면 불안정 요인들의 안정적이고 선순환적인 작용을 위한 기제들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국가이므로 ‘자유를 향한 절차에서의 국가의 공정’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은 비록 시장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본래적 의미의 시장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욕망의 한계를 넘어 경쟁의 이름으로 탐욕의 질주를 하고 있는 ‘난장(亂場)’만이 보일 뿐이다. 더욱이 오늘날 위험사회의 문화국가에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국가기능과 역할의 강조가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같이 국민을 향한 국가의 적대적 행태는 역사를 거꾸로 돌려 과연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금 갖게 한다. 정부가 법원을 동원하여 국민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며, 그것이 이른바 ‘명예’라면 누구의 무엇을 위한 명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차라리 노무현처럼 다시 정부의 신임을 묻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현행 헌법상으로는 신임투표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미 선례로서 헌법적 관습이 되어 있으며, 규범도 유기적 진화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개인적 입장으로는 현행 헌법해석으로도 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성찰없이 일방적으로만 관행화된 권력행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들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며 결국에는 많은 다수를 불행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상처로 남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서 7장 12절 말씀은 하나의 하느님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국가의 원수이든, 국민이든 동일한 행동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성찰하는 ‘공정국가’라면 국민을 상대로 침탈자로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조정자, 보호자로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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