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최근의 기사를 보면 북극의 얼음이 녹아 독일 화물선 두 척이 지난 7월 23일 울산에서 발전소 건설자재를 싣고 오호츠크해협을 통과해 러시아 연안 북극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들렀다가, 마침내 북극해를 관통하여 러시아 아르한겔스크항에 도착함으로써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다고 한다.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라고 불리는 이 바닷길을 러시아배가 아닌 국제 상선이 통과하는 것은 처음이고, 북동항로가 열림으로써 기존 항로보다 무려 1만4000㎞로 단축되어 이로부터 유발되는 경제적 효과 때문인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이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필연적 귀결인지 아니면 주기적 현상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인지의 문제다.


지구온난화는 말 그대로 지구 표면의 평균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며, 그 최근의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 발달에 따른 화석연료의 사용과 환경의 파괴로 정화기능이 약화되면서 생긴 온실가스의 영향때문으로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온난화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어왔다고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온난화의 원인은 주로 자연활동으로 인한 장기적 변화였다면, 오늘의 원인은 주로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단기적인 급격한 변화에 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사실(현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들이다. 즉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환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특수한 현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일상적인 자연활동의 한 측면인 주기적인 일반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들을 보게 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인식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행복의 추구라는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대책을 추구하게 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특수한 현상으로서 위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불순한(?) 다른 목적이 개입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자유의 구속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으며, 자연의 보편적 현상으로만 보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위험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다르게 하는 것은 바다로 가는 강물의 뿌리가 여럿이듯이 다른 각도에서 균형을 찾아감으로써 현재로서는 증명하기 어려운 해답을 모색하는 데에는 유용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오류를 피하고,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도 다양한 접근방식의 선택은 여전히 유용한 분석도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도 현실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단기적으로는 위험한 현상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추세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일상생활의 주변에서도 많이 확인 할 수가 있다.


단편적인 예로 주식시장에서의 주가의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살펴보더라도 단기적인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장기적인 추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크게 보면 추세 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변동도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순간만큼은 마치 지구의 종말처럼 절박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또 어느 정도의 추세를 나타낼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위험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거대기술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 이 위험 사회를 너머 '새로운 근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근대화는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의존해왔지만, 앞으로의 선택은 '속도'보다는 '안전'을, '외형'보다는 '내실'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한 순간도 ‘위험’이 아닌 적은 없었다. 비록 예견된 위험이었지만 감수하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선택들이 일상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는 쉽게 안정적인 역사가 되지만, 눈앞의 순간들은 늘 불안정적인 위험으로 강조되면서 본성적인 불안심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종교가 불안정적인 일상적 현실과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풀려지거나 고통을 배가한 역기능적 안순환의 경험(종교전쟁 등)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향들의 주류는 바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때문이리라. 종교보다는 과학적 성찰들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을 모두 잠재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뉴욕에서는 2012년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합의한 ‘교토의정서’가 만료됨에 따라 오는 12월 새로운 협약을 마련하고자 코펜하겐에서 열릴 기후변화총회에 대비하여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은 새로운 협약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온실가스 감축량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은 크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분명히 진행중인 지구온난화의 사실에 대한 ‘회의론’과 ‘옹호론’, ‘추세론’과 ‘위험론’을 떠나서,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현실인 ‘오늘의 위험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존을 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현재의 위험’ 속에 있다. 그 선택은 ‘자유’보다는 ‘공정’을, ‘선동’보다는 ‘성찰’을, ‘탐욕’보다는 ‘공감’을, ‘독선’보다는 ‘협력’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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