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0일 금요일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6 - 소리의 차이와 의미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6 - 소리의 차이와 의미



산골마을 노인의 9남매를 키운 평생지기 소 한 마리가 뚝심있는 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독립영화 한편으로 예상밖의 흥행가도를 달리며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고 있고, 이 나라 최초의 추기경이셨던 김수환추기경님이 며칠 전 선종을 하시어 세상의 가슴을 슬픔의 눈물로 적시고 있다.


소의 평균 수명이 15년인데도 불구하고 두배를 넘게 살아 40년을 함께 했고, 마지막 촬영시에는 남은 수명을 6개월에서 1년 남짓으로 예상했으나 3년을 더 살고 눈을 감았다고 하니, 왠지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서도 다시 부활했다며 미소를 띠며 나는 “바보야”를 전하던 추기경님의 최근의 모습이 떠오른다.


광우병으로 인한 촛불시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들도 벌써 기억의 저편에서 아련하기만 하고 그 때의 소는 마치 침투해서는 안되는 바이러스처럼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워낭소리로 전하는 경북 봉화 산골마을의 소는 노인과 더불어 바로 우리들의 고향과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다른 소리로 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바람이 바닥에서 나뒹굴 때 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 양심의 소리를 지켜내던 그 올곧음때문인지 며칠 밤낮의 도심의 거리를 메우고도 모자라 가시는 님의 옷자락을 붙들어 맬 기세로 연일 넘치는 추모의 행렬은 아직도 건재한 독재의 잔재가 뒷짐을 지고 내려보며 서있어도 가시는 님과의 대면을 흔쾌히 허락하신 그 큰 사랑때문이리라.


가장 자유로왔던 동행의 노인과 소, 그리고 가장 정의로왔던 외길의 추기경님, 이제 더 이상의 워낭소리와 성당의 종소리는 그대로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 분들이 함께 전해온 따뜻한 참진리의 소리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의 가슴에 워낭을 달고, 사람들의 영혼에 굳센 종탑을 세우셨기 때문이리라.


조선의 군주 정조의 숨은 편지가 최근에 공개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시파니, 벽파니 하면서 눈만뜨면 하는 일이 당쟁이라 들었는데, 아뿔사 정조의 가슴은 인간의 소리를 듣고 싶은 목마름의 절규였던 것 같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게 하고 그 다른 소리들 틈으로 진리의 길을 찾으려한 참 현명한 리더였던 것이다.


세상의 소리는 다양하고 위대하다. 때로는 논밭의 워낭소리로, 또 때로는 혼탁한 도심의 교회의 종소리로, 한편으로 깊고 은밀한 사찰의 종소리로, 때로는 망치로 국회의 문을 부수는 대결의 소리로, 또 때로는 혼돈의 새벽을 가르며 질주하는 열차로 몸을 내던지는 절망의 현실을 부르짓는 절규로 넘치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힘도 여전히 가슴으로 전하는 소리들이다.


그 소리들 중에서 가장 절박하고, 가장 외로우며, 가장 나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다수의 시민과 현명한 지도자와 건강한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싶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유시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우며, 그나마의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도 국가는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따뜻한 메세지로 다양한 소리들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힘있는 자는 자기관리능력이 뛰어나므로 굳이 국가가 보조하지 않아도 계속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힘없는 자들은 요즘같이 끝도 없는 추락의 시대에는 하루를 넘기기도 힘들다. 과연 국가는 살아남을 자들만을 위해서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죽어간 자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오바마정부의 정책목표가 중산층의 부흥이라고 한다. 과거 부시정권의 가진 자들을 위한 향연이 결국 오늘의 위기를 낳았고, 그러한 탐욕에 대한 반성을 교묘한(?) 방법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나 할까 아니면 조선의 현명했던 군주, 정조처럼 각자 다른 서로의 소리를 내게 하여 해답을 찾으려는 것일까.


아무튼 오바마는 멀티미디어시대의 리더답게 경북 봉화의 노인과 소, 그리고 추기경님, 조선의 군주 정조처럼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는 소리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세상이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예언가들은 아시아의 부흥을 점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분명 기회가 오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저절로 자신의 몫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의 침몰은 섬의 침몰이 아니라 하나의 소리에 대한 획일적이고 본능적인 기질로 인한 집착으로 스스로 자멸일 확률이 높다. 아직도 전체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한계를 스스로 폭로하는 일이며,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재정립이 없이는 결코 가슴으로 전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들의 미래가 없는 이유이다.


중국 역시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가장 많은 다양성을 가졌다는 것은 반대로 미래 가장 큰 경쟁력으로 희망을 가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눈가림에 급급하면서 소수민족의 소리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경쟁력도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지금은 추락하고 있어도 다양한 소리들의 천국, 미국의 침몰을 이야기하기에는 여전히 이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워낭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성당의 종소리도 예전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다양한 소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가슴으로 전하려는 사람과 가슴으로 들으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될 것을 강요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관심과 배려가 바로 우리의 미래요, 경쟁력이요, 희망의 싹이 될 것이다.


행여나 무너질까 하루도 빠짐없이 침묵의 가슴으로 소통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향의 워낭소리와 평생 한결같이 소외된 자의 소망을 담아내신 추기경님의 기도의 종소리들이 자랑스런 어제를 있게 했듯이 오늘 더 깊고 높아지는 아우성들을 더욱 더 큰 사랑으로 담아내어 멀리 휴전선너머까지 서로의 믿음을 전할 수 있도록 내일 그분들이 물려주신 종탑을 더 높이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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