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9일 금요일

[황매산] 지금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

 

[황매산] 지금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



눈부시게 화려한 스타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은막의 화려한 무대를 뒤로하고 잊혀진 배우를 그리워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사랑도 네가 눈부실 때는 얼마든지 관대하다.

그러나 네가 조락할 때는 의도하지 않은 이별을 늘 염두에 둔다.

 

슬퍼지만 그게 대부분의 현실이고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오늘, 그러한 차가운 현실을 박차고

이미 은막 뒤로 사라진, 한철 지난 황매산으로 향한다.

 

철쭉이 져버린 뒤의 황량한 황매산,

네가 조락해도 그리워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휴일 서울의 새벽은 늘 서울이 아닌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가끔씩 그만한 시간에 출근을 한 적이 있어도, 산행하는 날의 시간은 특별하다.


그렇게 산행은 항상 집 앞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고속도로는 예상 밖으로 시원하게 뚫린다.


대전-진주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시간이 단축된 점도 있겠지만,

정체없이 내달린 덕에 예정 시간보다 30분일찍 등산초입인 장박마을에 도착했다.


시작은 늘 긴장을 동반한다.

초반상태가 좋아야 마지막까지 잘 나간다.


960봉을 지나 군데군데 철쭉군락지들을 본다.

물론 텅빈 가슴들이다.


뼈만 앙상한 가지, 눈부시게 화려했던 시절의 처절한 잔재들,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한 번 제대로 주질 않아도 나는 그들과 침묵의 대화를 한다.


황매봉으로 오르는 길은 억새군락이다. 내 키보다 큰 풀잎들이 눈을 가린다.

살며시 젖혀보니 햇살을 받지 못해 검게 썪어가는 흙이 반갑게 얼굴을 내민다.


드디어 해발 1,108미터 황매봉 정상이다.

멀리 합천호가 보이고, 상봉, 중봉, 하봉으로 추정되는 봉우리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멀리 합천호 위로는 삼봉의 그림자는 있지만 매화는 없다.

그래도 너는 충분한 장관이다.


정상을 지나니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온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초원지대인 이 높은 고도에 차들이 빽빽하다. 오프로드동호회모임인 듯 하다.


영화촬영세트장을 지나 약3키로 정도 예상했던 하산이 의외로 쉽게 끝났다.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샛길로 빠져나온 탓도 있지만 생각보다 쉬운 길이었다.


길 가의 코스모스, 가을을 알리고 있고 귀경길도 예상외로 순탄하다.

드디어 서울이다. 예상보다 2시간여를 단축했다.


남겨둔 모산재황포돛대바위, 그리고 누군가의 순결을 시험해 볼 순결바위

다음 기회에 꼭 한번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면서 아쉬움을 접어둔다.

 

미련이나마 있어야 다시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눈부시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


황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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